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존 퀸시 애덤스 (문단 편집) === 대통령 당선 후 === [[제임스 먼로]]의 임기 중반부터 나타난 경기침체가 조금씩 호전되고 나라가 안정된 상황에서 대통령이 되었기 때문에, 애덤스의 임기는 대형 사건이나 눈에 띄는 업적없이 조용하게 지나갔다. 연방파가 정계에서 소멸된 상황이었지만 애덤스는 아버지의 영향을 받아서 전임 대통령들과 달리 강한 연방주의를 신봉하였다. 매디슨과 먼로는 각 주의 도로나 운하 건설에 연방 정부가 개입하는 건 주의 자유를 침해하는 것이라고 생각하였지만 애덤스는 연방 정부가 중심이 되어 도로나 운하 건설이 수행되어야 한다고 강력히 주장했다. 박식한 지도자답게 교육과 천문학에도 관심이 많아서 워싱턴에 국립대학과 천문관측소를 설립할 것을 제안하였다. 또한 미국은행의 허가를 유지하는 것도 찬성하였고 뉴잉글랜드와 뉴욕에 집중된 미국 제조업을 보호하기 위해 수입품에 높은 관세를 매겼지만 남부와 서부 지역에 불리하게 작용하는 바람에 이는 남부에서 증오스러운 관세법이라고 비판받았다. 주특기인 외교에서도 국무장관 시절과 달리 이렇다할 성과가 나지 않았다. [[1826년]] 파나마 국제회의에서 미국 대표가 참석하지 않았는데 이 회의에 미국 대표를 참석시키자는 것은 남아메리카의 [[시몬 볼리바르]]가 서구 국가들의 협력을 증진시키자는 의도로 주장하였다. 하지만 당시 남부 출신 의원들이 중심이었던 연방의회는 미국에서 실시하는 노예제가 국제회의에서 비난받을 것이 두려워서 국제회의에 참석할 대표단의 인준을 늦게 가결한다.[* 미국 외교에서는 정부보다 의회의 권한이 더 크기 때문에 애덤스는 이 안건에 지시를 내릴 파워가 부족하였다.] 뒤늦게 대표단은 파나마로 출국했지만 그들이 도착하자마자 회의는 종료되었다. 애덤스 본인도 문제가 있었다. 아버지를 많이 닮아서 고집스럽고 괴팍한 성격에, 융통성도 없어 전임자인 먼로와 달리 연방 의원들을 소집하여 설득할 수완과 대화를 이끄는 능력이 부족하였다. 애덤스의 정치적 기반이 뉴잉글랜드와 뉴욕에 한정된 점도 새로운 정책을 발의해도 국민들에게 지지받지 못한 이유 중 하나였다. 임기 말인 [[1828년]]에 애덤스는 재선을 노렸고 경쟁자는 4년 전 애덤스에게 대통령 자리를 빼앗겨 설욕을 다짐하던 잭슨이었다. 이 시기 민주공화당도 잭슨을 지지하는 일파와 애덤스를 지지하는 파벌로 분열되는데 잭슨을 지지하는 파벌이 현재의 [[민주당(미국)|민주당]]을 창당하고 애덤스를 지지하는 파벌이 국민공화당을 창당한다. 국민공화당은 훗날 [[휘그당]]의 전신이 되는데, 휘그당이 정식으로 출범한 해는 [[1834년]]이지만 애덤스를 지지하고 잭슨을 반대한 세력들이 모여서 창당한 당이므로 이들이 휘그당의 전신이다.[* 후일 휘그당은 [[공화당(미국)|공화당]]의 전신이 된다.] 잭슨은 자신의 인기를 십분 활용하는 것은 물론 애덤스를 귀족들과 부유층의 대통령이라고 대대적으로 힐난하는데, 애덤스는 잭슨의 선전에 대해 크게 방어하려고 하지 않은 것이 화근이 되어 잭슨에게 참패한다.[* [[1824년]] 선거의 투표자는 36만명이었는데, [[1828년]]에 모든 주에서 재산권과 상관없는 투표권이 부여되면서 115만명이 투표에 참여하면서 애덤스를 반대하던 유권자가 늘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